2026
집(안채)에서 압축(ZIP)하기 – 여성적 기록과 미디어 고고학의 교차
: 황수경 ( 독립기획 )
봄날, 여성들은 집을 벗어나 산으로 오른다. 그들은 꽃을 따고, 화전을 부치며, 서로의 이야기를 나눈다. 누군가는 시집살이를 말하고, 누군가는 친정을 떠올리며, 또 누군가는 그저 웃고 노래한다. 그 자리에서 말들은 이어지고, 문장은 덧붙여지며, 노래는 함께 불려진다. 이것이 조선 후기 규방가사 <화전가>가 생성되고 향유되는 방식 중 하나이다1).화전가는 음력 3월 중순 무렵의 화전놀이를 소재로 한 규방가사이며, 화류가·화수가·낙유가 등으로도 불린다. 다만 그 창작 방식은 단일하지 않다.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창작되기도 하고, 미리 지어온 작품이낭송되기도 하며, 놀이 뒤 돌아와 다시 감회를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화전가는 고정된 단일 텍스트라기보다, 여성들의 유희와 기억, 말하기와 기록이 교차하는 유동적 형식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이 사실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화전가>를 단지 “여성들이 봄날 즐겁게 노는 노래” 정도로 축소해버리면, 그 형식 안에 들어 있는 기록의 기술과 공동 향유의 구조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화전가에는 분명 놀이가 있다. 그러나 그 놀이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라, 규중의 여성들이 잠시 일상의 위계와 역할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감정을 말하고, 기억을 엮고, 서로의 목소리를 이어가는 자리였다. 개인의 경험은 공동의 리듬으로 번역되고, 사적인 정서는 반복과 낭송을 거치며 공유 가능한 언어가 된다. 그러므로 화전가는 여성 문학이면서 동시에 여성적 기록방식의 한 장면이며, 더 나아가 공동체적 수행과 전승의 구조를 갖는 매체적 형식으로도 읽힐 수 있다. 이 점에서 화전가를 기술의 범주 바깥에 두는 기존의 무관심이야말로, 무엇이 기술로 인정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가르는 오래된 인식의 위계를 드러낸다.
기술은 미래에 속하지 않는다. 기술은 이미 존재해 왔다. 우리가 오늘날 기술이라 부르는 것은 흔히 기계, 데이터, 알고리즘, 혹은 효율과 혁신의 언어로 제한된다. 그러나 그렇게 좁혀진 정의 바깥에도 오랫동안 작동해 온 수많은 기술들이 있었다. 특히 여성의 삶 속에서 반복되어 온 돌봄, 유지, 기록, 관계 맺기의 방식은 자연스럽고 사소한 것으로 취급되며 기술의 명칭을 박탈 당해왔다. 페미니스트 고고학이 지적하듯, 역사와 학문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여성의 실천은 종종 구조적으로 주변화되어 왔다2). 이른바 ‘유지 활동(maintenance activities)’은 사회를 지속시키는 핵심 기능임에도 오랫동안 주변적인 것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규방가사, 특히 화전가는 기술로 불리지 않았던 기술, 곧 사회적 재생산과 감정의 공유, 반복과 전승의 구조 속에서 작동한 여성적 기록 기술의 한 사례로 읽힐 수 있다.
다만 여기에서 고고학과 미디어 고고학은 엄격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고고학이 과거의 물질문화와 사회적 실천을 해석하는 학문이라면, 미디어 고고학은 매체의 시간성과 구조를 선형적 진보가 아닌 층위의 중첩된 시간 구조로 이해한다3). 이 둘은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서로 다른 층위에서 만날 수는 있다. 페미니스트 고고학이 여성의 실천이 어떻게 지워졌는지를 묻는다면, 미디어 고고학은 무엇이 매체로 인식되고 무엇이 비가시화되었는지를 묻는다. 이 두 질문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규방가사는 더 이상 단순한 고전시가가 아니라, 과거의 여성적 실천이 현재의 감각 구조 속에 어떻게 잠복해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된다. 규방가사를 미디어 고고학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고고학을 미디어 고고학으로 오해하는 일이 아니라, 삭제된 기록 방식의 구조를 오늘의 매체 환경 속에서 다시 감지하는 일이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박슬기의 《화전가》는 단순히 고전을 참조한 전시가 아니다. 그것은 여성적 기록의 구조와 디지털 이미지의 구조를 한 화면 안에서 교차시키는 작업이다. 박슬기는 그간 회화, 설치, 영상, 텍스트를 넘나들며 여성성의 재현, 전형(stereotype), 젠더화된 사물, 주변화된 존재의 얼굴을 다뤄왔다. 작가의 이전 비평문과 전시 서문을 보면, 그녀의 작업은 적어도 2018년의 <밝히면서 밝히기>와 <죽은 정물화>를 경유하며 가사노동, 여성의 위치, 대상화와 자기 감각의 긴장을 다뤄왔고, 2019년의 <N송이의 꽃 N개의 모양>, 2021년의 <꽃들에게 언어를 주자>, 그리고 <여/성.화>를 거치며 ‘꽃’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여성성과 재현의 문제를 밀도 있게 수렴하는 장으로 이동했다4).
이 계보를 따라가면 박슬기의 꽃 그림은 단순한 꽃 그림이 아니다. 이연숙(리타)5)의 비평이 정확히 짚듯, 그녀가 관심을 두는 것은 사회적 주변 존재, 값싸고 흔하고 쉽게 버려지는 사물, 그리고 그런 사물들과 여성의 조건 사이에 형성되는 감정 이입과 동일시의 구조이다. 조화, 돌, 고무장갑, 압화, 디지털 꽃 모델 등은 모두 박슬기의 화면에서 비천하고 하찮은 대상이면서 동시에 얼굴을 부여받는 존재들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재현을 폐기하는 대신, 오히려 그 전형 속으로 들어가 그것을 분해하고 전유하는 방식으로 대안적 초상을 만든다. 이 점이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녀의 작업은 여성화된 사물들을 단순히 숭고화 하거나 복권 시키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왜 그것들이 하찮게 여겨졌는가?”, “왜 그것들이 장식적이고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되었는가?”라는 질문을 이미지의 차원에서 되돌려 묻는다.
그래서 박슬기의 회화는 사실주의적 재현을 통해 오히려 재현의 이데올로기를 흔든다. 멀리서 볼 때 그의 꽃 그림은 너무나 ‘꽃 그림’답다. 정물화의 문법을 충실히 따르는 것처럼 보이고, 잘 그려졌으며, 심지어는 일부러 작가적 과장을 지운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면 그 충실함 자체가 일종의 함정처럼 작동한다. 이미지가 지나치게 정갈하고, 지나치게 성실하며, 지나치게 “꽃 그림”의 전형을 수행하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그 전형이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의식하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박슬기의 사실성은 자연주의가 아니라 비판의 방식이다. 그녀는 꽃 그림의 전통을 거부하는 대신, 그 전통이 여성 예술가에게 요구했던 순응과 격하의 역사를 정성스럽게 수행함으로써 그 역사를 안쪽에서 흔든다. 이연숙(리타)이 지적했듯, 바로 이 “정성스럽게 복종하는” 태도 속에 균열이 숨어 있다.
박슬기의 꽃 연작을 더 정확히 보려면, 그의 작업에서 꽃이 하나의 단일한 기호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여/성.화>에서 꽃은 이미 시드는 존재, 죽어가는 존재, 무섭게 저무는 존재로 등장한다. 반면 <조화로운 그림>, <자연스러운 그림>, <생생한 그림>에서는 ‘가짜 꽃’이 오히려 더 조화롭고 자연스럽고 생생하게 제시된다. 박슬기는 바로 여기서 꽃의 가치 체계를 뒤집는다. 생화는 유한하고 쇠락하며, 조화와 디지털 꽃은 애초에 살아 있었던 적이 없기에 죽어갈 수도 없다. 이때 가짜 꽃은 진짜의 실패한 복제품이 아니라, 다른 존재론적 조건을 가진 이미지가 된다. 그 이미지는 진짜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진짜라는 기준 자체가 어떻게 구성되는지 폭로한다. 박슬기의 작업이 ‘가짜’를 연민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화면 위로 귀하게 올려놓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녀에게 가짜는 결핍이 아니라, 주변부의 존재가 자신의 방식으로 지속하는 장면이다.
이번 《화전가》에서도 작가는 실제 꽃과 돌멩이를 다중 촬영하고, 포토그래메트리로 3D 모델을 구축한 다음, 후디니(HOUDINI)에서 물성과 물리 효과를 적용해 형태를 납작하게 만들거나 구부리고 늘이며 시뮬레이션한 뒤, 이를 다시 2D 이미지로 변환하여 최종적으로 회화로 재현한다. 작가 노트에서 확인되듯, 그녀가 주목하는 것은 ‘디지털의 납작함’과 ‘자연스러운 것에 대한 의문’이다. 이 이미지는 자연을 담은 듯 보이지만, 실제 대상의 외형을 유지하지 못하고 변위(displacement)된 형태와 물성을 가진 새로운 대상이기 때문이다. 즉 박슬기의 회화는 자연을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자연이 이미지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생기는 균열을 그리는 그림이다.
여기서 박슬기의 회화는 단순한 디지털 기반 회화가 아니라, 이미지의 존재 조건에 대한 비판적 실험이 된다. 그녀는 디지털 이미지를 신뢰하지 않는다. 동시에 그것을 포기하지도 않는다. 작가 자신의 답변처럼, 디지털 이미지에 대한 감정은 언제나 복합적이고 양가적이다. 가상과 컴퓨터 그래픽, 인공지능의 언캐니함에 매혹되면서도, 절대로 가까워질 수 없다고 느끼는 그 감정이야말로 이 작업의 핵심 동력이다. 그래서 그녀는 디지털 이미지를 그대로 내버려두지 않고, 다시 손으로 옮긴다. 이때 회화는 재현이 아니라 필사이며, 필사는 기계가 만든 이미지를 인간의 감각으로 다시 수행하는 행위가 된다. 이로써 디지털의 비물질성은 회화의 물질성과 충돌하고, 이미지의 확실성은 다시 흔들린다.
전시장에 놓인 작품들은 처음에는 정물화처럼 보인다. 꽃과 돌,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구성은 익숙한 회화의 질서를 따른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갈수록 형상은 미묘하게 어긋난다. 꽃잎은 비정상적으로 납작하거나 비틀려 있고, 표면은 자연의 물성과 일치하지 않는 이상한 질감을 띤다. 관람자는 이 이미지가 생화인지 조화인지, 실제 사물인지 디지털 모델인지, 혹은 그 중간 상태인지 단번에 판단할 수 없다. 바로 이 지연이 중요하다. 그 멈칫하는 순간, 우리는 자연스러움의 기준이 얼마나 취약하게 구성되어 있었는지를 감각하게 된다. 박슬기의 그림은 그 감각의 틈을 열어 놓는다.
이러한 점에서 박슬기의 작업은 미술사적으로도 흥미로운 위치를 차지한다. 그것은 전통적인 정물화의 계보를 호출하면서도, 그것을 여성화된 장르로 둘러싼 경멸의 역사까지 함께 소환한다. 동시에 그것은 디지털 이후의 회화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묻는다. 포스트-인터넷 회화가 종종 디지털 이미지의 표면성과 유통 구조에 주목해왔다면, 박슬기의 작업은 그보다 더 느리고 성실한 방식으로 디지털 이미지의 존재 조건을 다시 회화 안에 눌러담는다. 다시 말해 그녀의 작업은 디지털 이미지를 소비하지 않고, 그것을 오래 바라보고, 의심하고, 다시 그리는 행위를 통해 회화를 “번역의 장”으로 전환 시킨다. 이때 회화는 세계를 재현하는 매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다시 감각의 차원으로 데려오는 매체가 된다.
여기서 내가 이전 ZIP 전시에서 주목했던 ‘납작함’과 ‘차원’의 문제는 《화전가》에서 더 정교하게 변주된다. 그때 나는 박슬기의 작업을 압화, 플랫랜드, 다차원, 그리고 회화의 재현을 가로지르는 문제로 읽었다. 지금 돌아보면그 독해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화전가》에서 그 문제는 차원 일반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으로 생성된 이미지가 다시 회화로 압축되고 번역되는 방식으로 더 구체화 된다. 꽃은 납작해지고, 데이터는 압축되며, 이미지는 다시 그려진다. 그리고 이 압축의 구조는 규방가사의 형식과도 포개진다. 여러 목소리와 감정, 말하기와 기억이 하나의 가사 안에 압축되듯, 박슬기의 꽃 역시 여러 층위의 물질과 감각, 실제와 가상을 화면 안에 압축한다.
이제 ‘집’이라는 개념이 다시 중요해진다. 규방가사가 생성된 안채는 단순한 생활 공간이 아니라, 노동과 감정, 기억과 기록이 축적되는 장소였다. 집은 이미 매체 환경으로 작동했다. 현대 미디어 이론에서도 집은 더 이상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정보가 생성되고 교환되는 네트워크 구조로 이해될 수 있다6). Media House 프로젝트가 “집은 컴퓨터이고 구조는 네트워크”라고 말했을 때, 이는 집이 물리적 거주 공간이면서 동시에 정보가 순환하는 인터페이스라는 뜻이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집’과 ‘ZIP’은 만난다. ZIP은 서로 다른 데이터와 시간, 층위를 하나의 구조로 압축한다. 규방가사는 감정과 기억을 언어로 압축하고, 박슬기의 작업은 물질과 데이터를 이미지로 압축한다. 그러므로 “집(안채)에서 압축(ZIP)하기”는 단순한 언어유희가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의 기록 구조가 공유하는 공통의 문법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교차 속에서 기술은 다시 정의된다. 기술은 단순한 디지털 장치가 아니라, 수행과 기록, 반복과 번역이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디지털 인문학이 보여주듯, 기술은 단지 정보를 저장하거나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지식생산과 감각 형성의 조건 자체를 변화시킨다7). 바로 그렇기 때문에, 여성의 기록 방식과 디지털 이미지의 작동방식은 같은 것이 아니면서도,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박슬기의 회화는 그 거울 앞에 오래 서 있는 작업이다.
결국 2026년 《규방-가사》 프로젝트는 이러한 구조를 드러내는 실천이며, 박슬기의 《화전가》는 그 첫 장에서 가장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무엇을 자연스럽다고 믿고 있는가. 그리고 무엇을 쓸모없다고 판단하고 있는가. 꽃, 정물, 장식, 돌봄, 반복, 감정, 회화—이 모든 것이 너무 오랫동안 하찮고 부차적인 것으로 밀려나 있었다면, 박슬기의 작업은 바로 그 밀려난 것들에 다시 화면의 중심을 내어준다. 다만 그것은 위로의 방식으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의 회화는 다정하기보다 집요하고, 아름답기보다 의심 많으며, 재현하기보다 흔든다. 그렇기 때문에 더 귀하다. 이 전시는 꽃을 예쁘게 보여주는 전시가 아니다. 오히려 꽃이라는 전형을 통과해, 여성성과 이미지, 자연과 기술, 진짜와 가짜를 둘러싼 우리의 감각 체계를 다시 묻게 만드는 전시이다.
* 참고: 박슬기의 작업 계보와 꽃·돌·고무장갑·압화·디지털 꽃 모델을 둘러싼 문제는 이전 비평문과 전시 자료를 바탕으로 정리했다. 특히 <밝히면서 밝히기>(2018), <죽은 정물화>(2018), <N송이의 꽃 N개의 모양>(2019), <꽃들에게 언어를 주자>(2021), <여/성.화>(2021)와 이후 꽃 연작의 전개는 황수경,「회화와 차원: 시적인 탐구」, ZIP 전시 서문 원고와 박슬기《화전가》 작업 문서에서 확인된다. 또한 꽃 연작에 대한 “전형의 수행과 균열”, 가짜 꽃과 주변적 사물의 대안-초상, 그리고 돌봄과 폭력의 양가성에 대한 논의는 이연숙(리타)의 박슬기 전시 비평문 「전형(stereotype) 돌보기」의 문제의식을 참조해 재구성했다. 두 비평 원문을 바탕으로 핵심 논지를 반영하였다.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화전가(花煎歌)」, 한국학중앙연구원.
화전가는 음력 3월 무렵 화전놀이를 소재로 한 규방가사로, 현장 창작, 사전 작성, 사후 기록이 모두 가능하며, 개인 창작과 공동 향유, 구술과 필사가 교차하는 유동적 형식을 지닌다.
2) Sandra Montón-Subías and Enrique Moral,“Gender, Feminist, and Queer Archaeologies,”in Encyclopedia of Global Archaeology, Springer, 2018.
3) Jussi Parikka, What is Media Archaeology?, Polity Press, 2012.
4) 황수경,「회화와 차원: 시적인 탐구」, 《ZIP》 전시 서문 원고 및 박슬기 작업 자료 (2018–2023).
5) 이연숙(리타), 「전형(stereotype) 돌보기」, [2024 서호미술관 기획전]박슬기 개인전 《피:자 PII:JA》 비평문. 2024.
6) Lucy Bullivant, “Media House Project: the House is the Computer, the Structure is the Network,” 2001.
7) Ana María Cuesta Sánchez & Ángel Pazos-López (eds.), Digital Humanities for the XXI Century Museum, 2024.
